한글 자판/자판에 얽힌 이야기들

현행 키보드 배열이 인체공학적이지 못한 이유

DS1TPT 2021. 9. 5. 10:09

 〈세벌식 자판〉 항목에서 공세벌식의 운지법에 관해 다뤘었다. 이번 글은 그 글의 연장선이지만, 세벌식보다는 키보드(글쇠판) 그 자체의 배열을 다루기 때문에 〈자판에 얽힌 이야기들〉 항목에서 다루려고 한다.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이 쓰는 키보드 배열은 아주 인체공학적이지 못하다. 왜 이런 불합리한 배열이 정착했는지를 알아보려면 타자기를 알아야 한다. 간단하고 빠르게 짚고 넘어가고, 인체공학적이지 못한 점에 초점을 맞추기로 한다.


타자기의 배열 특징을 그대로 이어받은 키보드

 타자기는 실무에 쓸 일이 별로 없다. 하지만 타자기는 오랜 시간동안 빠르게 글을 써야 하는 곳에서 이용되었고, 서구권에서는 문인의 상징이기도 하다. 타자기는 처음에는 그 배열이 지금의 키보드와 조금 달랐지만, 지금 키보드에서 쓰는 배열이 정착된 후 거의 모든 타자기가 그 배열을 따르게 된다.

처음 QWERTY 배열이 적용된 타자기의 사진(1873)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File:Sholes_typewriter.jpg

 위의 사진은 QWERTY 배열이 들어간 타자기이다. 1873년에 만들어진 프로토타입이며, 자판을 잘 보면 지금과 같이 계단식 글쇠 배치를 한 것을 볼 수 있다. 다만, 몇몇 글쇠들의 위치가 다르고 숫자가 왼쪽으로 한 자리씩 치우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계단식 배치는 지금의 것과 거의 같다.

35AST 전신타자기 자판. 출처: https://apple2history.org/history/ah03/

 위의 사진은 한 전신타자기의 자판을 찍은 것이다. 지금의 쿼티 배열과 아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영문자의 자리는 완전히 같고, 기호의 자리만 조금 다르다. 윗글쇠의 위치는 지금과 같고, 기능키들은 전신타자기에 맞추어 배치되어 있다. 글쇠 배치를 보면 지금 키보드와 다를 것이 전혀 없다. 2·3열은 어긋남이 덜하고, 1·4열은 어긋남이 심하다.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Typewriter_%22Adler%22.jpg

 계단식 배치를 써야만 타자기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위의 타자기는 계단식 배치를 적용하지 않은 타자기이다. 계단식 배치를 왜 썼는가가 드러나는 사진이기도 한데, 글쇠와 활자대를 잇는 쇠막대를 보면, 수많은 쇠막대가 서로 엉키지 않게 하기 위해 휘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쇠막대를 일정한 곡률로 휘어서 만드는 것은 당연히 만들기가 어렵고 생산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 그래서 이런 수직 일자 배열(Ortholinear라고도 함)의 타자기는 많이 만들어지지 않았고, 대부분의 타자기들이 생산이 편리하고 또 대중적인 계단형 배열을 사용하였다.

글쓴이가 가지고 있는 마라톤 네벌식 타자기의 글쇠 배열

 위 사진은 글쓴이가 가지고 있는 마라톤 네벌식 타자기의 글쇠 배열이다. 지금 쓰고 있는 키보드와 배열이 거의 같다. 뒷걸음쇠(백스페이스), TAB 따위의 위치가 다르지만, 윗글쇠와 윗글걸쇠의 위치가 완전히 같다. 숫자의 위치도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기호 자리는 여전히 조금 다르다. 타자기의 글쇠와 활자대를 잇는 막대기를 Adler 타자기와 비교해보면 확연히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글쓴이의 마라톤 타자기는 이 막대기가 모두 곧다. 하지만 Adler 타자기는 휘어있다.


인체공학을 헤아리지 못한 키보드 배열

 여러 타자기의 사진을 지금 키보드의 배열과 비교해보면, 지금 키보드의 글쇠 어긋남 정도와 글쇠 배치, 기능키 배치는 타자기와 거의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여러분이 쓰고 있는 키보드가 이 타자기의 잔재를 엄청나게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인데, 이 때문에 여러분의 키보드는 아주 인체공학적이지 못하다. 그 이유를 추리면 다음과 같다:

  • 왼손을 편하게 움직였을 때의 이동 궤적과 글쇠 배치가 맞지 않음. 왼손으로 글자를 이어칠 때 손꼬임이나 손목 꺾임이 일어나기 좋음
  • 1열과 4열은 어긋남이 심하나, 2열과 3열은 어긋남이 덜해 손가락의 움직임이 복잡함
  • 왼손과 오른손 자리가 너무 붙어있어 타자 자세가 불편함
  • 윗글쇠를 새끼손가락으로 눌러야 함
  • 스페이스 바(사이 띄우개)가 너무 길어 공간을 효율적으로 쓰지 못함
  • 백스페이스와 엔터를 비롯한 기능키를 모두 새끼손가락으로 조작하여야 함

 

일반적으로 쓰이는 운지법

 위의 그림은 일반적으로 쓰이는 운지법이다. 앞서 말했던 인체공학적이지 못한 부분의 첫 항목과 연관된다. 왼손의 운지법을 보면, 왼손 손가락을 표준 운지법대로 치려면 손이 항상 좌우로 움직여야만 하고, 여러 조합에서 손가락이 오그라들거나 손목이 꺾일 수밖에 없는 조합이 만들어진다. 자연스러운 자세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 또, B(그림에서 검정색 ㅜ) 글쇠와 6(그림에서 ㅑ) 글쇠의 자리가 애매하다. B는 왼손으로 쳐야하는 글쇠이지만, 표준 두벌식은 기호 자리를 유지하려 B 자리에 ㅠ를 놓았다. B는 분명히 왼손으로 치는 글쇠 자리이지만, B의 위치가 애매하여 이런 문제가 생겼다. 6 자리는 더 심하다. 인체공학 키보드마저 MS 스컬프트나 로지텍 K860은 6을 왼손 자리에 놓는데, 다른 인체공학 키보드는 6을 오른손 자리에 놓는 등 치는 법과 위치가 통일되지 않았다. 숫자만 따진다면 6은 오른손으로 누르는 것이 맞지만, 표준 키보드 배열에서는 6은 왼손으로 더 치기 좋다. 그래서 공세벌식이 ㅑ를 왼손으로 치도록 설계되어 있는데, 두벌식과 세벌식 모두 이 배치에 심하게 얽힌 꼴이다. 신세벌식은 3줄 배열이라 운지법 문제가 생기지는 않지만, 이 설계 문제에 얼힌 자판이 생각보다 되게 많다.

CAS 속기 자판의 글쇠 배열. 출처: https://www.ansansteno.com/2020/06/vs.html

 속기 자판을 보면 손목이 한 점으로 모이도록 되어 있어서 손목을 꺾거나 어깨를 움츠리지 않아도 바른 타자 자세가 나오게 되어 있다. 더불어, 글쇠가 수직으로 일자로 배치되어 있어서 손가락을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고, 이 때문에 오타가 날 여지가 적다. 속기 자판이기에 직접적으로 비교하기는 애매한 면이 있지만, 손목과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움직이도록 배열된 것을 잘 알 수 있다.

 

 윗글쇠를 새끼손가락으로 누르는 것이 왜 좋지 않을까? 윗글쇠를 치는 동작이 불편한 이유를 알면 바로 그 까닭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윗글쇠를 치는 동작이 불편한 이유를 추린 것이다:

  • 이어치는 자판에서 모아치기 동작을 수행해야 함
  • 누르고 떼는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오타를 일으킴
  • 탄력적으로 누르기가 어려움
  • 윗글쇠 사용 직후 같은 손가락을 거듭 쓰거나, 손을 멀리 뻗는 동작이 생김

 

 윗글쇠를 쓰게 되면 모아치기 동작을 수행하여야 한다. 이 모아치기는 세벌식에서 흔히 지원하는 "모아주기"와는 다르다. 무조건 윗글쇠를 누른 채 한 글쇠를 눌러야만 한다. 그래서 윗글쇠를 누르는 시간은 다른 글쇠를 누르는 시간보다 길 수밖에 없고, 탄력적으로 누르기가 어려워 손가락에 무리가 많이 간다. 그래서 윗글쇠를 누르는 손가락은 큰 부담을 떠안게 된다. 그러니 이 윗글쇠를 가장 여린 손가락인 새끼손가락으로 치게 한 것이 최악의 선택일 수밖에 없다.

 윗글쇠를 새끼손가락으로 치게 한 것이 나쁜 까닭이 더 있는데, 새끼손가락으로 윗글쇠를 누른 바로 다음 새끼손가락으로 다른 글쇠를 누르는 동작과 또 윗글쇠를 누른 직후 손을 멀리 뻗는 동작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런 동작은 오타를 유발함은 물론이고, 손을 크게 벌리거나 손을 빠르게 움직이는 것, 탄력적이지 못한 글쇠를 누른 직후 새끼손가락을 또 쓰게 되어 손에 큰 무리가 간다. 오른손을 생각하면 백스페이스, 엔터와 같은 기능키마저 새끼손가락으로 눌러야 하여 새끼손가락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두벌식 표준 자판으로 칠 때 이런 동작이 나오는 때가 꽤나 많다. "예법"을 타자하려면, 윗글쇠(왼쪽)+ㅔ를 누른 직후 새끼손가락으로 ㅂ을 쳐야만 한다. "~겠습니다"를 칠 때에는 오른손 새끼손가락이 ㅔ를 친 직후 윗글쇠를 쳐야 한다. 공세벌식 자판도 이런 움직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두벌식과 달리 공세벌식은 이런 것도 헤아려서 윗글쇠를 친 직후 새끼손가락을 거듭치는 경우와 손을 멀리 뻗는 것을 최소화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윗글쇠를 전혀 쓰지 않아도 완성 한글을 칠 수 있는 갈마들이 공세벌식 자판과 신세벌식 자판에도 윗글쇠 사용까지 헤아린 배열이 들어갔다. 그래서 공세벌식이나 신세벌식을 쓰면 첫소리 ㄹ이 조금 멀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윗글쇠가 엄지 자리에 있었다면, 이런 불편함이 전혀 없었을 것이다. 공세벌식의 ㄹ이 조금 더 좋은 자리로 갔을 수도 있다. 두벌식과 세벌식 모두 타자기의 설계 논리에 피해를 많이 입은 꼴이다.

공병우 세벌식에서 윗글쇠를 누른 직후 자주 치는 첫소리 글쇠 위치

 스페이스 바가 너무 긴 것도 문제이다. 스페이스 바는 물론 양손으로 누를 수 있는 글쇠이므로 긴 것은 이해할 만 하지만, 스페이스 바가 차지하는 공간이 너무 많아 다른 기능키들이 좋은 자리를 뺏기고 말았다. 스페이스 바를 짧게 하고 다른 기능키를 남는 자리에 놓는 것이 필요하다. 엄지는 비록 움직이기는 불편하지만 힘이 센 손가락이라 백스페이스와 같이 자주 거듭치는 글쇠를 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더 나아가면 엔터나 Delete까지 누르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왜 표준 키보드 배열이 인체공학적이지 못한가에 대해 알아보았다. 현행 키보드는 타자기에 얽힌 배열 논리가 고착되어 인체공학적인 자판을 만들어도 살 사람이 적고, 사는 사람이 없으니 만드는 회사도 적고 값도 비싼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자판을 치는 시간이 늘어나며 인체공학적 키보드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이 늘어나기는 했으나, 다수의 사람들이 손가락보다는 손목에 집중하는 것 같다. 당장 가장 쉽게 구할 수 있고 가장 흔한 인체공학 키보드인 MS 스컬프트나 로지텍 K860은 손목의 건강과 어깨에 너무 집중했다. 그래서 "인체공학 키보드"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글쇠 배열은 인체공학적이지 못한 타자기의 배열을 그대로 갖다 박아놓았다. 사실 이해가 되지 않는 선택은 아니다. 타자기에 대한 경로의존성이 타자기를 쓰지 않게 된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져오고 있어서, 글쇠 배열까지 바꾸면 사람들이 적응하기 어렵다. Ergodox, Keyboardio와 같은 조금 더 인체공학적인 키보드들을 쓰려면 손가락의 움직임을 교정해야 하고, 한 번 이런 배열이 익숙해지면 일반 키보드를 사용할 때 손가락의 움직임이 달라 오타가 너무 많이 난다.

 타자기에 얽힌 설계와 그에 사람들이 적응하며 생긴 경로의존성이 문서의 전자화가 아주 중요한 지금에 와서 사람들의 손목과 손가락 건강을 해치고 있다. 하지만 이 경로의존성의 벽을 부수기는 몹시 어렵다. 그래서 글쓴이도 인체공학적 자판을 2개 정도 가지고 있지만 쓰지 못하고, 일반 키보드를 쓰고 있는 형편이다. 언젠가 이런 배열 문제가 해결되어 인체공학 키보드가 널리 쓰였으면 좋겠지만, 현실의 벽은 너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