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자판/다른 자판들

옛 표준 네벌식 타자기 자판의 문제점과 표준 두벌식 자판

DS1TPT 2021. 8. 28. 00:15

 지금 자판 표준인 KS X 5002가 여러 문제로 논란거리가 된 것과 비슷하게, 네벌식을 표준으로 지정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논란이 있었다. 네벌식 자판은 첫소리 한 벌, 가운뎃소리 한 벌, 끝소리 한 벌의 세벌식과 달리 가운뎃소리가 두 벌이나 있다. 속도가 중요한 타자기에서 이런 번잡한 자판이 쓰인 건 컴퓨터로 아주 빠르게 글을 넣을 수 있는 지금의 시점에서 바라보면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 글에서는 네벌식 타자기가 홀소리를 두 벌이나 가지고 있는 이유와 네벌식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 그리고 현재 표준인 두벌식 자판에 끼친 영향을 알아본다.

 


1. 네벌식 자판의 배열도와 타자법

옛 표준 네벌식 타자기 자판의 배열도. 출처: https://pat.im/965

 초록색 닿소리는 첫소리, 빨간색 닿소리는 끝소리이다. 주황색 홀소리는 받침이 있을 때 또는 조합할 때 먼저 치는 홀소리, 갈색 홀소리는 받침이 없을 때 또는 조합할 때 나중에 치는 홀소리이다. 두벌식만 쓰던 사람들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할 것이다. 세벌식 쓰는 사람도 이건 번잡하기 짝이 없는 자판인데, 이렇게 만든 이유는 이따가 다루기로 하고, 먼저 타자법부터 알아보자.

  • 초성은 별로 다를 게 없다. 그냥 치면 된다.
  • 조합하지 않는 홀소리를 칠 때, 받침이 붙으면 주황색, 붙지 않으면 갈색 홀소리 글쇠를 친다.
  • 조합하여 치는 겹홀소리를 칠 때, 받침이 붙지 않으면 주황색→갈색 순으로 친다.
  • 조합하여 치는 겹홀소리를 칠 때, 받침이 붙으면 주황색 홀소리 글쇠만 친다.
  • 받침이 있는 ㅖ: 주황색 ㅕ를 친 후 사이띄우개(스페이스 바)를 '누른 채' 주황색 ㅣ를 치고, 사이띄우개를 놓는다.
  • 받침이 없는 ㅒ: 주황색 ㅑ를 친 후 사이띄우개를 누른 채 갈색 ㅣ를 친다.
  • 받침이 있는 ㅒ: 주황색 ㅑ를 친 후 사이띄우개를 누른 채 주황색 ㅣ를 친다.
  • 받침 ㅋ 빠르게 치는 법(글꼴이 이상함): ㄱ을 친 다음 뒷걸음쇠(백스페이스)를 한 번 누른 다음, ㅈ을 친다.
  • 받침 ㅋ을 예쁘게 찍는 법(번잡함): 뒷걸음쇠를 누른 후, 둥글대 손잡이를 돌려 종이를 한 칸 위로 올린다. 그 다음, '첫소리' ㅋ을 찍고, 둥글대 손잡이를 다시 돌려 종이를 한 칸 아래로 내린다(원래 위치로 돌림).
  • 겹첫소리는 두 번 눌러 찍어도 되고, 윗글쇠로 찍어도 된다. 글꼴은 윗글쇠로 찍은 것이 더 예쁘고, 윗글쇠로 찍는 것이 정석이다.
  • 배열도에 없는 겹받침을 칠 때, 먼저 오는 받침을 찍고 뒷걸음쇠를 누른 다음 사이띄우개를 누른 채 다음 받침을 친다. 빠르게 쳐야 하는 때에는(글꼴에 신경쓰지 않아도 될 때) 군동작 없이 바로 이어친다.

 

 이것이 네벌식 옛 표준 타자기의 '간략히 추린' 타자법이다. 얼마나 외울 것이 많고 번거로운가? 받침이 붙냐 안붙냐, 홀소리를 조합하느냐 안하느냐에 따라 치는 글쇠가 달라지고, 아예 끝소리 ㅋ은 글쇠가 없어서 둥글대를 조작하거나 전혀 연관이 없는 글자 ㄱ·ㅈ를 겹쳐 찍어 모양만 ㅋ을 만드는 식으로 타자해야 한다. 이 무슨 끔찍한 자판 배열이란 말인가? 거기다가, 네벌식 자판은 윗글쇠 사용도 엄청나게 많다. 타자 능률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글쓴이는 타자기 특유의 감성이 좋아서 값이 그리 비싸지 않은 네벌식 타자기를 가지고 있는데, 아직도 홀소리 구분에서 걸려 오타를 자주 내곤 한다. 손목도 별로 좋지 않은데, 윗글쇠를 누르고 있는 채 왼손과 오른손을 번갈아가며 치는 때가 나오면 손목을 꺾지 못해(손목 보호대 때문에) 윗글쇠를 눌렀다 땠다 하면서 새끼손가락에 무리를 주기도 한다. 글쓴이야 취미 수준에서 쓰는 것이지만, 이걸 직업적으로 치라고 했다면 손병 걸렸을 것 같다.

 


2. 옛 표준 네벌식 자판의 문제점과 그 원인

 네벌식 옛 표준 자판의 문제점을 추리면 다음과 같다.

  1. 윗글쇠를 너무 많이 쓴다.
  2. 윗글쇠를 친 직후 윗글쇠를 친 새끼손가락을 뻗어 치는 경우가 잦다.
  3. 윗글쇠를 친 직후 손을 뻗는 일이 많다.
  4. 윗글자를 연달아 치는 경우가 많다.
  5. 겹첫소리와 거센소리를 윗글쇠로 찍는다.
  6. 배열도에 받침 ㅋ이 없다.
  7. 홀소리가 두 벌 있고, 치는 방법이 복잡해서 오타를 내기 좋다.
  8. 군동작이 많다.
  9. 받침 없는 ㅖ는 있는데, 받침 있는 ㅖ가 없다. 타자법이 일관되지 못하다.
  10. 마침표와 쉼표를 윗글쇠로 넣어야 한다.
  11. 자모 빈도에 맞지 않게 배열되어 있다.
  12. 타자 흐름이 복잡하다.

 

 정말 추리고 추린게 이정도다. 지소를 조합하는 방법만 알면 정말 익히기 쉽다고 인정받는 음소문자, 자질문자 한글을 왜곡했다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은 자판 배열이다. 그럼 왜 이런 배열이 나오게 되었을까? 정치적인 요소가 있었을 수도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글꼴이 아닌가 한다.

 

 공병우 세벌식 자판은 타자기 시대부터 정말 빠르기로 유명했다. 공병우 세벌식 자판과 경쟁하던 자판은 김동훈식 다섯벌식 타자기 자판인데, 이 둘은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 공병우 세벌식은 오로지 속도라고 보아도 괜찮고, 김동훈 다섯벌식은 예쁜 네모꼴의 글꼴을 지향하는 자판이라 보면 된다. 김동훈 다섯벌식은 첫소리 두 벌, 가운뎃소리 두 벌, 끝소리 한 벌의 구조이고, 공병우 세벌식은 첫소리 한 벌, 가운뎃소리 한 벌, 끝소리 한 벌의 구조이다. 당연히 공병우 세벌식이 간단하고 속도가 빠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속도가 중요한 곳에서는 탈네모꼴 글꼴을 쓰는 공병우 세벌식을 썼고, 김동훈 다섯벌식 자판은 느리더라도 네모꼴의 정갈한(?) 글자를 찍으려는 곳에서 쓰였다.

 네벌식 자판은 네모꼴로 쓰되, 다섯벌식보다 덜 번잡하게 칠 수 있다. 그래서 당시 평가는 둘의 '단점을' 합친 자판이라는 얘기가 많았고, 타자 협회 등지에서 엄청나게 반대를 하긴 했지만, 네벌식 타자기 자판을 공병우 세벌식과 김동훈 다섯벌식의 절충안으로 볼 수도 있다. 홀소리가 두 벌이나 있는 이유가 이 "네모꼴 글꼴"에 있다. 받침 있는 홀소리 글쇠는 안움직글쇠이고, 홀소리의 길이가 짧거나 받침 없는 홀소리보다 위로 올라가 있다. 받침 있는 홀소리 글쇠는 움직글쇠이고, 홀소리의 길이가 길거나 아래로 내려가 있다.

글쓴이가 직접 친 네벌식 타자기의 타자 예시

 위의 그림은 해상도가 낮긴 하지만, 왜 네벌식 타자기가 홀소리를 두 벌이나 두었는지를 바로 보여준다. [볼 수]를 보면 '볼'의 홀소리 ㅗ는 위로 올라가 있으면서 수직으로 긋는 획의 길이가 짧다. 반대로 '수'의 홀소리 ㅜ는 받침이 없어 조금 내려와 있고, 수직으로 긋는 획이 길다. [않았다]를 보면, '않'과 '았'에 쓰인 ㅏ와 '다'에 쓰인 ㅏ의 길이가 다르다. 받침이 없을 때와 있는 때를 구분하여 치는 이유가 네모꼴 글꼴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여기에 얽힌 명분이 하나 있다. 바로 공병우 타자기는 받침이 붙는 홀소리와 붙지 않는 홀소리를 구분해 치지 못하여 '이'를 '일'로 변조하기 딱 좋다는 것. 글쓴이의 솔직한 생각은 그런 변조는 아주 번거롭다는 것이다. 그렇게 변조를 하려면 종이 위치를 정확히 맞추고, 가늠쇠의 위치를 정확히 맞추고, 또 빠르게 칠 때 찍힌 것처럼 적당한 힘으로 글쇠를 누를 필요가 있다. 삐끗하면 변조한 티가 확 난다. 뭐, 정보국 수준에서 변조를 하려면 못할 이유는 없다. 귀찮을 뿐.

 

 타자 흐름이 복잡하다는 이야기를 꺼냈는데, 타자 흐름을 시각화하면 아래의 그림과 같다.

네벌식 옛 표준 자판의 타자 흐름.

※ 분석에 소설로 구성된 340만 자모 표본을 사용했으며, 홀소리 벌 구분에서 오류가 생겼을 수도 있다. 변환에는 날개셋 편집기의 텍스트 필터 기능을 사용하였다.

 

 이것이 네벌식 옛 표준 자판의 타자 흐름이다. 지금 쓰이는 두벌식 표준, 공병우 세벌식 자판들, 신광조 세벌식 자판들과는 달리 이어친 궤적이 너무 긴 것과 더불어, 앞서 간추린 문제점들이 그대로 드러났다.

 


3. 네벌식 옛 표준 타자기 자판이 현행 표준 두벌식 자판에 끼친 영향?

 표준 두벌식 자판과 네벌식 옛 표준 타자기 자판은 많은 면에서 닮았다. 네벌식 옛 표준 자판과 전신 타자기용 두벌식 표준 자판의 영향을 아주 많이 받았기 때문인데, 같거나 비슷한 점, 네벌식 설계 논리가 이어진 점을 추리면 다음과 같다:

  1. 겹닿소리가 있는 닿소리 ㄱ·ㄷ·ㅂ·ㅅ·ㅈ가 모두 2열에 줄지어 있다.
  2. 3열(ㅁㄴㅇㄹ……)의 윗글 자리에 있는 홀소리는 모두 2열로 올렸다.
  3. ㅜ·ㅡ는 받침이 붙는 홀소리 자리를 쓰고, ㅠ는 ㅜ의 옆인 B 자리에 두었다.
  4. 3열의 윗글 자리에 있던 첫소리 ㅋ·ㅌ·ㅍ·ㅊ는 4열로 내렸다.
  5. 기호 자리를 모두 영문 쿼티 자판과 같게 했다.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네벌식 타자기 자판/두벌식 전신타자기 자판에서 그대로 따오되 쿼티 자판과 정합되게 한 게 전부다. 현행 표준 두벌식 자판은 그냥 기존에 있던 자판을 두벌식으로 하고 컴퓨터 환경에 맞게 기호 배치만 바꾼 꼴이니, 타자기에 얽힌 설계 요소가 거의 그대로 남아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구는 공병우 세벌식이 타자기 설계 요소가 꽤 되지 않냐고, 시대에 뒤떨어진 배열이 아니냐고 비판하는데, 모르는 말씀이다! 표준 두벌식이 오히려 공병우 세벌식보다 '한참' 심했으면 심했지, 덜하지 않다. 두벌식은 아예 타자기 자판을 '그대로' 가져와 모아쓰기 오토마타만 덧댄 꼴이다. 반면, 공병우 세벌식은 타자기 구현도 생각하면서 컴퓨터에 맞게 배열을 개량한 꼴이다(3-90과 갈마들이 공세벌식 계열이 단적인 예이다). 3-90을 보면 한글 타자의 편리성과 사무용/프로그래머용으로의 기호/숫자 타자의 편리성을 헤아린 꼴이고, 3-91(공병우 최종)은 직결식 한글 처리(컴퓨터 환경에 얽힌 이야기가 있음)와 문장용 타자의 편리성을 아주 헤아린 꼴이다. 갈마들이 공세벌식은 입력기를 쓸 수 있는 환경에서 순아래로 타자할 수 있게 하면서 타자기에서의 구현까지 할 수 있게 설계된 자판이다.

 뭐, 어느 자판이든 기계식 타자기 설계 요소를 아주 빼기가 어려운 이유도 여러가지가 있긴 하다. 당장 지금 거의 모든 사람이 쓰고 있는 컴퓨터 키보드(글쇠판)의 모양과 배열이 타자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글쇠를 계단형으로 배치하는 것이 그 예이다. 기계식 타자기는 글쇠와 활자가 연결되는 막대가 걸리지 않게 하면서 설계·생산을 쉽게 하려면 계단형 배치 말고는 답이 없다. 글쇠를 수직으로 일자로 배열하려면 이 막대들을 휘어야 하여 불량률이 높아지고 단가가 비싸진다. 하지만, 컴퓨터 키보드는 애초에 전자 회로라서 그런 제약이 없다. 이 인체공학적이지 못한 배열이 계속 쓰이는 것도 타자기를 오래 쓰면서 생긴 경로의존성과 호환성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또 하나 예를 들어보면, 핵폭탄이 터진다거나 하여 전자기 펄스로 전자 제품이 모두 깡통이 되었을 때, 기계식 타자기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아 이런 재앙적인 상황에서 빛을 발할 수 있다. 이것 말고도 이유가 많지만, 싫어도 자판을 설계할 때 타자기에 얽힌 설계 논리를 아주 버리기가 어려운 까닭이 생각보다 많다.

 

 네벌식 얘기를 하다보면 두벌식에 관한 얘기를 안할 수 없다. 두벌식 표준 자판은 효율에 관한 논의가 제대로 되지 않은 자판이다. 애초에 비효율적인 자판을 근본으로 두었는데, 어찌 표준 두벌식 자판이 능률적일 수 있을까? 개인 자판 연구가들이 연구한 결과물이 이른바 '전문가'들이 연구했다는 표준 두벌식 자판보다 한참 효율적인 것만 보아도 답이 나온다. 표준 자판을 만든다면 능률적이고, 전문가와 컴맹 모두, 누구나 쉬이 칠 수 있는 배열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나, 현행 표준 두벌식 자판은 그렇지 못하다. 네벌식 타자기는 정부가 내세웠던 글자판 통일의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경쟁하는 글자판을 하나 늘린 꼴이 되었고, 이후 네벌식 표준을 폐기하며 만든 두벌식 표준 자판(KS X 5002)는 또 다른 한글 자판 논쟁을 일으키며, 자판이 세벌식과 두벌식(표준)으로 양분되는 결과를 낳았다. 받침을 구별할 수 있는 세벌식 자판을 표준으로 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그냥 두벌식으로 했더라도 두벌식의 틀에서 가장 효율적인 배치를 연구해서 그것을 표준으로 하였으면 좋았을탠데, 지금 표준을 보면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