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자판/두벌식 자판

두벌식 자판은 왜 부분 배열 변경이 어려울까?

DS1TPT 2021. 8. 21. 17:31

두벌식 자판은 닿소리와 홀소리를 각각 한 벌씩 늘어놓은 자판 배열이다. 가장 흔히 쓰이는 두벌식 자판은 KS X 5002, 이른바 두벌식 표준 자판일 것이다. 글쓴이는 세벌식을 쓰고 또 세벌식이 더 효율적인 자판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나, 두벌식보다 익혀야할 글쇠 자리가 많아서 두벌식보다 배우기 어렵다. 그래서 타자를 자주 치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세벌식보다 두벌식이 나을 수 있다. 독수리 타법을 하는 사람에게도 세벌식보다는 두벌식이 더 나을 수 있다.
두벌식은 언뜻 보기에 아주 간단해보이는 자판이지만, 설계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꽤나 머리가 아픈 자판이다. 새로 배열을 짠다면 모르겠지만, 이미 있는 배열을 개선한다고 하면 골때리는 일을 세벌식보다 많이 겪는다. 이와 달리 대부분의 세벌식 자판은 부분 배열 변경이 쉽다. 받침의 자리가 특히 그런데, 자주 쓰이지 않는 받침의 위치를 바꾸어도 해당 받침을 칠 때의 움직임만 "교정"하면 되어 적응이 빠르다. 공세벌식을 이미 익힌 사람들은, 특히 갈마들이 공세벌식을 익힌 사람들은 홀소리 배치만 같다면 일주일 안에 새 자판에 완전히 익숙해질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두벌식은 그렇지 못하다. 그럼 그 이유는 무엇일까?

첫소리와 끝소리를 구분하지 않는 두벌식 자판에서 닿소리의 배치를 2~3개만 바꾸어도 다음과 같은 일이 생긴다:

  • 첫소리를 치는 위치와 끝소리를 치는 위치가 같이 바뀐다.
  • 끝소리를 친 후 첫소리를 치려고 할 때의 타자 흐름이 모두 바뀐다.


첫소리를 친 다음 끝소리를 칠 때의 타자 흐름이 모두 바뀌면 단 2~3개만 바꾼 것만으로도 엄청난 학습 시간이 필요하다. 세벌식 자판은 첫소리 한 벌, 가운뎃소리 한 벌, 끝소리 한 벌로 총 3개의 벌이 있다. 자판 차원에서 첫소리와 끝소리를 구분한다. 그래서 첫소리 배열을 바꾸어도 끝소리 타자 흐름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고, 마찬가지로 끝소리의 배열을 바꾸어도 첫소리의 타자법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반면 두벌식 자판은 닿소리 한 벌, 홀소리 한 벌로 구성되어 있다. 닿소리 한 벌로 첫소리와 끝소리를 모두 쳐야하여 배열을 부분적으로 바꾸기가 어렵다.

아래의 그림은 표준 두벌식 자판과 ㄱ·ㄹ 자리를 맞바꾼 두벌식 자판의 타자 흐름을 시각화한 것이다.

두벌식 표준 자판
두벌식 표준에서 ㄱ과 ㄹ의 자리를 맞바꾼 배열

그림을 언뜻 봐서는 뭔 얘기를 하고싶나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선의 궤적을 잘 보면 차이점이 눈에 보일 것이다. 타자 흐름 시각화에서, ㄱ과 ㄹ의 자리를 맞바꾼 것 때문에 이 두 자리의 궤적이 바뀐 것을 볼 수 있다. 선의 두껍고 얇은 부분이 모두 바뀌었는데, s↔r, s↔f, d↔r, d↔f, f↔t, r↔t 등 선의 굵기가 다른 부분이 아주 많다. 달랑 닿소리 2개만 바꾸어도 타자 흐름이 크게 달라진다. 직접 10분만 타자해보면 두 자리를 바꾼 것만으로도 얼마나 어색하고 타자 흐름이 달라지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

두벌식 표준 자판은 두벌식 자판 중에서 꽤나 비효율적인 꼴이다. 여기에는 여러 문제가 얽혀있는데, 간단히 추리면 다음과 같다:

  1. 네벌식 옛표준 자판과 아주 비슷한 꼴이고, 전신 타자기용 표준 두벌식 자판과는 아예 같은 배열을 쓴다.
  2. 타자기 설계에 얽힌 문제로, 된소리가 있는 닿소리가 모두 2열에 줄지어 있다. 이 때문에 ㅁ보다 빈도가 높은 ㅂ, ㄹ보다 빈도가 높은 ㄱ이 2열에 있다.
  3. ㅓ보다 빈도가 높은 ㅡ가 4열에 있다.
  4. 빈도가 낮은 ㅑ가 ㅏ의 윗자리에 배열되어 있다. ㅑ보다 빈도가 훨씬 높은 ㅐ·ㅔ는 ㅑ에 밀려 각각 2열의 약지, 소지 자리에 있다.
  5. ㅝ를 타자할 때 같은 손가락을 거듭쳐야 한다(두벌식은 홀소리를 치는 쪽의 거듭치기를 아주 없앨 수 있으나 표준 두벌식 자판은 그러지 못하다).
  6. 받침 ㅆ을 항상 윗글쇠로 타자해야 한다(ㅆ 받침은 ㅅ 받침보다 빈도가 높다).

네벌식 옛표준 타자기 자판의 배열 문제에 얽힌 자판이기에 발생하는 문제가 다수이다. 네벌식 옛표준 자판의 배열도는 다음과 같다.

네벌식 옛표준 타자기 자판 배열. 출처: https://pat.im/965

네벌식은 조합용/받침이 붙는 홀소리와 단독으로 쓰이는 홀소리를 구분하여야 한다. 그래서 세벌식보다도 글쇠 자리가 많이 필요하다. ㅏ의 윗글 자리에 ㅑ, ㅓ의 윗글 자리에 ㅕ를 배치한 꼴인데, 윗글에 있던 홀소리를 모두 2열로 올리면 지금의 두벌식 표준 자판과 아주 비슷한 배치가 나온다.
현행 표준 두벌식의 배열을 일부분만 변경하면 익히기는 조금 나을지 몰라도, 기존 두벌식 표준 자판을 쓰던 사람들을 끌어들이기가 뭣해진다. 효율을 챙기다보면 현재 두벌식 표준 자판과는 완전히 다른 배열이 되고 만다. 홀소리 배열은 어떻게 호환성을 유지한다고 쳐도, 닿소리 배열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두벌식은 닿소리 글쇠 하나로 첫소리와 끝소리를 모두 넣기 때문에, 닿소리 배열을 짤 때 헤아려야 할 것이 꽤나 많다.

  1. 받침 빈도와 첫소리 빈도
  2. 같은 손가락 거듭치기 빈도(끝소리→첫소리)
  3. 손가락 이동 거리
  4. 어느 받침이 나온 뒤에 어떤 첫소리가 자주 나오는가
  5. 어느 첫소리가 나온 뒤에 어떤 받침이 자주 나오는가
  6. 윗글쇠를 친 직후 소지의 사용 빈도
  7. 윗글쇠를 친 직후 손을 뻗는 것의 빈도

이렇게 헤아려야 할 것들이 많아서 두벌식 자판은 단순해보이는 모양과 달리 닿소리 배열을 짜기가 굉장히 어렵다. 그나마 ㅒ·ㅖ를 각각 ㅑ+ㅣ, ㅕ+ㅣ로 조합하게 하면 6, 7번에 적어놓은 부담은 덜 수 있다.
타자 흐름 시각화 그림에서 아래의 그림은 표준 두벌식 자판에서 ㄱ과 ㄹ의 자리를 맞바꾼 것인데, 이렇게 하면 빈도수가 높은 ㄱ을 3열에 배치하게 되어 좋은 점이 꽤나 많다. 하지만, ㄳ·ㅀ 받침의 타자가 어려워지고 거의 쓰지 않는 ㄽ 받침을 치기가 편해진다. 그럼 이 겹받침들을 더 치기 편하게 배열을 조정한다고 치면, 처음에는 2개로 시작했지만 결국 큰 공사를 하게 된다.
세벌식 자판은 이런 문제에서 두벌식보다 자유롭다. 세벌식 자판은 윗글쇠를 전혀 쓰지 않게 배열을 짜기에 좋다. 된소리는 그냥 닿소리를 두 번 누르게 하면 되어(두벌식은 첫소리·끝소리 구분자가 없어서 불가능하다), 첫소리를 타자할 때 연타를 아예 없앨 수 있다. 그러면 첫소리와 끝소리가 분리되어 홀소리를 친 다음 받침을 어디서 칠 것이냐, 다음 한글 조합에서 어디를 치게 될 것인가 하는 정도만 따져도 된다. 3-2015, 3-P3, 3-D2 자판을 보면 중지·검지 받침 배열 배치가 들쭉날쭉하지만 다른 자판으로 바꾸기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흐름이 거의 대부분 유지되고, 해당 받침으로 가는 흐름만 바뀌기 때문이다.
두벌식 자판에서 계속 닿소리 배열만을 논하는 것은 두벌식에서 피로를 일으키는 주범이 닿소리이기 때문이다. 홀소리는 이중모음을 조합할 때 연타가 없게 하고 빈도수에 맞게 배치만 하면 되지만, 닿소리는 따져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하여튼, 이런 문제들을 모두 헤아려서 닿소리 배열을 개선하면 현행 표준 두벌식과는 완전히 다른 배치가 나올 수밖에 없다. 부분 개선을 하려면 기존 배열과의 호환성까지 생각해야 하기에 개선폭이 제한된다. 그래서 부분 개선으로는 큰 폭의 효율 개선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큰 폭의 효율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별로 달라진 것도 없네. 힘들게 배워도 지금 쓰는 것보다 그다지 편하지 않을 것 같은데?'

세벌식 자판에 대한 정부·기관의 대우가 나빴음에도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은 표준 두벌식 자판/옛표준 네벌식 자판에 비해 훨씬 효율이 좋았기 때문이다. 어떤 세벌식 자판이든, 세벌식 자판을 배우는 사람들은 오랜 시간 쓰던 두벌식을 버리고 힘겹게 세벌식을 배우는데, 그 이유는 거의 다 타자 효율 때문이다. 한 세벌식에서 다른 세벌식으로 넘어가는 것도 다 타자를 더 빠르고 편안하게 치기 위함이다.
개선 두벌식으로 표준 두벌식 사용자들을 끌어들이려면 1) 기존 자판과의 호환성 2) 아주 개선된 타자 효율을 동시에 달성해야만 하는데, 앞서 설명한 문제들 때문에 이런 배열을 만들기는 매우 어렵다. 더군다나 자판 배열 자체가 공동 개발이 어려운데, 두벌식은 조금만 바꾸어도 원래의 설계 의도가 틀어지기 딱 좋은 꼴이다. 그래서 세벌식보다도 공동 개발을 하기가 어렵다. 이렇다보니, 개선된 두벌식 자판들 중 실용적으로 쓰이는 것들은 표준 두벌식 자판의 틀 안에서 갈마들이로 겹받침을 한 타에 넣게 한다거나, 홀소리 글쇠를 연타하여 초성 쌍자음을, 홀소리 글쇠를 연타하여 받침 쌍자음을 입력하도록 한 것(ㄱ+ㅏ+ㅏ+ㄱ+ㄱ=깎)이 전부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럼, 표준 두벌식 자판과의 호환성을 깨고 아주 효율적인 배치를 하면 어떤 모양이 될까? 해답은 3-2015 자판과 신세벌식 2015 자판을 설계한 소인배의 〈두벌식 최적안〉에 있다.

소인배 두벌식 최적안 배열도

닿소리 배열은 ㅇ을 빼고는 표준 두벌식 자판과 같은 곳이 없고, 홀소리 배열도 연타를 없애고 효율적인 배치를 하여 두벌식 표준 자판과 완전히 다르다. 소인배 두벌식 최적안은 두벌식의 틀에서 아주 좋은 효율을 보이지만, 표준 두벌식과 배열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표준 두벌식 자판 사용자들이 이 자판을 쉬이 익히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소인배 두벌식 최적안을 배우는 것은 공세벌식보다는 덜할지는 몰라도, 표준 두벌식에서 신세벌식으로 바꾸는 것만큼 힘들 것이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두벌식 자판은 부분 개선으로는 효율이 그다지 좋아지지 않아 매력적이지 못하다. 아예 호환성을 포기하고 큰 폭으로 배열을 바꾸면 기존 자판과 완전히 달라진다. 이런 자판들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세벌식 자판들과 타자 능률로 직접 겨루어야 하는데, 왼손가락의 거듭치기가 많고 손놀림이 복잡하여 세벌식보다 불리한 처지에 놓일 수 있다. 그렇다 보니 자판을 바꾸기 어려운 이들을 끌어들이기에 애매하고 자판을 바꾸려는 이들을 끌어들이기도 애매한 꼴이다. 사실, 세벌식 자판도 가장 널리 쓰이는 것이 3-90과 3-91이라서 큰 폭의 변경을 하지 못하고 소폭 변경하는 수준이다. 다만, 공세벌식은 갈마들이를 적용하며 호환성과 효율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는 했다.
다행히도, 두벌식 자판은 필요로 하는 글쇠 자리가 적어 모바일 기기에서 쓰기에 세벌식보다 편하고, '사용자 입장에서' 배열이 아주 깔끔하다. 외워야 하는 한글 낱자 자리의 수가 적어 배우기 쉬운 것도 장점이다. 모바일 자판만을 따진다면, 모아키와 같이 글쇠 자리를 크게 줄이면서 빠르게 타자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래서 글쓴이는 두벌식 자판도 장점이 꽤나 있기 때문에 개선 작업을 어느 정도는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